브롬톤(Brompton Bicycle) 앤드루 리치(Andrew Ritchie) 창업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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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리치 (Brompton Bicycle) 프로필 | 소울파파마케팅
핵심 요약

런던 정원사였던 리치는 자연 속을 달리는 감각으로 자전거를 탔고, 기존 접이식 자전거가 실제로 쓸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알았다. 공학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기존 설계의 논리에 갇히지 않았다. 라이선스 판매 5년 실패 뒤 설계를 단순화하지 않고 직접 제조를 택했고, 1982년 생산이 멈춰도 도면을 바꾸지 않았다. 1986년 재개를 가능하게 한 것은 기관 투자가 아니라 이미 브롬튼을 써본 사람들의 자금이었다. 1979년 특허 구조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으며, 브롬튼은 연간 약 5만 대를 생산하는 영국 최대 자전거 제조사다.

자전거를 탄 정원사

앤드루 리치(Andrew Ritchie)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탔는지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그는 평생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만 몇 가지는 추론할 수 있다.

1970년대 런던에서 정원사로 일한다는 것은 이동이 많은 일이었다. 사우스 켄싱턴과 첼시 일대의 개인 정원을 오가려면 이동 수단이 필요했다. 정원사 수입으로 런던에서 차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지하철은 공구 가방과 함께 타기 불편했다. 버스는 느렸다. 자전거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원사에게 자전거는 통근 이상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흙을 만지고 식물을 다루는 사람은 자연과의 접촉을 일상으로 산다. 런던의 가로수 사이를 페달로 지나가는 것, 계절마다 달라지는 바람의 온도를 피부로 느끼는 것. 차 안에서는 닿지 않는 감각들이다. 정원사가 자전거를 좋아했을 이유는 아마 그쪽에도 있었을 것이다. 이동 수단이기 이전에, 바깥을 몸으로 통과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런던 거리의 자전거 통근자는 눈에 띄게 늘었다. 연료 가격이 오르고 대중교통이 혼잡해지면서 자전거는 더 많은 사람에게 현실이 됐다. 리치도 그 흐름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전거를 탄 사람만이 겪는 불편함을 매일 마주쳤을 것이다. 목적지까지 페달 하나로 닿지 않을 때, 지하철 환승 구간에서 자전거가 짐이 되는 그 순간을.

쓸 수 없는 자전거가 있었다

접이식 자전거가 없던 게 아니었다. Bickerton Portable이 1971년에 나와 있었다. 접혔다. 하지만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고, 접힌 상태도 컸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거나 버스 짐칸에 싣기에 여전히 불편했다. 도심 이동 수단으로 실제로 쓰기에는 공학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이 남아 있었다.

리치가 Bickerton을 직접 써봤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1976년 설계에 착수했다는 것은, 기존 해법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의 결정이었다. 문제를 몸으로 안 사람이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원사가 설계할 수 있는 이유

정원을 돌보는 일은 구조를 읽는 일이다. 어떤 순서로 무엇이 이어져야 하는지, 각 부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작동하는지를 손과 눈으로 이해하는 훈련이다. 공학을 배운 사람은 왜 기존 설계가 그렇게 됐는지 알고, 그 이유 안에서 생각한다.

리치는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물을 수 있었다. 접이식 자전거가 왜 그렇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만이, 왜 꼭 그렇게 접혀야 하는가를 질문할 수 있었다.

침실 창밖으로 브롬튼 오라토리(Brompton Oratory) 성당이 보였다. 그 방에서, 1976년 6월, 정원사가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브롬튼 바이시클(Brompton Bicycle)의 공식 창립일은 1976년 6월 3일이다.

5년 동안 아무도 사지 않았다

처음 구상은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설계를 기성 제조사에 라이선스로 파는 것이었다. 1979년, 특허를 출원했다. 도면을 들고 영국의 대형 자전거 제조사들을 돌았다.

거절이 돌아왔다. 시장이 작다, 단가가 높다. 이유는 달랐고 결과는 같았다. 5년이 지났다. 아무도 그 설계를 사지 않았다.

리치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제조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설계를 단순화하거나, 더 싼 값에 도면을 넘기거나. 그는 둘 다 하지 않았다. 아무도 사지 않은 그 설계가 그대로 첫 번째 자전거가 됐다.

1982년, 생산이 멈췄다

직접 만들기 시작했지만 속도가 붙지 않았다. 선주문을 받아 부품을 조달하고 한 대씩 손으로 조립해 납품하는 방식이었다. 규모가 없었고 자금이 돌지 않았다. 1982년, 생산이 중단됐다.

리치는 사업을 닫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하면서 제조 가능성을 계속 탐색했다. 설계는 건드리지 않았다. 자금이 끊긴 자리에서 설계를 단순화해 다시 만들 수도 있었다.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 버티는 동안 굽히지 않은 1979년 도면이 그대로 남았다.

브렌트퍼드 철도 아치, 1986년

1986년, 자금이 다시 모였다. 기관 투자가 아니었다. 지인들과 이전 고객들이 돈을 냈다. 브롬튼을 한 번 이미 산 사람들이었다. 나임 오디오(Naim Audio) 창립자 줄리언 베레커(Julian Vereker)가 은행 대출 보증인이 됐다. 나임 오디오는 음질을 타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오디오 장비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 회사를 세운 사람이 설계를 바꾸지 않은 자전거의 보증인으로 섰다.

생산 재개 장소는 런던 브렌트퍼드(Brentford)의 철도 아치 아래였다. 기차가 지나가는 고가 구조물 아래 공간. 4년 동안 손대지 않은 1979년 도면으로 다시 자전거를 만들기 시작했다. 1988년 초, 대량생산 브롬튼이 다시 거리에 나왔다.

2002년 윌 버틀러애덤스(Will Butler-Adams)가 합류했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연간 생산량은 6,000대에서 약 4만 대로 늘었다. 직원은 24명에서 190명이 됐다. 2009년 3월, 월 매출이 100만 파운드에 근접했다. 그달 직원들이 받은 보상은 피시 앤 칩스였다.

1,200개의 전용 부품, 브레이징, 그린포드

브롬튼 한 대에는 1,200개가 넘는 부품이 들어간다. 그 대부분이 브롬튼 전용으로 제작된다. 일반 단속 자전거는 300개 정도, 복잡한 로드 바이크도 1,000개 정도다. 공통 규격 부품으로 바꾸면 공급처를 늘리고 단가를 낮출 수 있다. 리치는 그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강철 프레임은 용접이 아니라 브레이징(brazing)으로 접합한다. 사람 손이 직접 가야 하고 자동화가 어렵다. 1979년 특허에서 잡은 기본 프레임 구조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세부 디테일만 조금씩 다듬어졌다. 전 생산 공정은 그레이터런던 그린포드(Greenford) 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2019년 기준 매출 4,200만 파운드 이상, 직원 315명, 연간 생산 약 5만 대. 브롬튼은 영국 최대 자전거 제조사다. 1995년 퀸스 어워드 포 엑스포트(Queen’s Award for Export)를 받았고 2009년에는 프린스 필립 디자이너스 프라이즈(Prince Philip Designers Prize)를 받았다.

소울파파마케팅의 시선

1986년, 브롬튼이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자금을 댄 것은 기관 투자자가 아니었다. 시장 조사도 아니었다. 이미 한 번 타본 사람들이었다.

리치는 거절당했다. 라이선스를 사겠다는 제조사가 없었다. 자금이 끊겼다. 생산이 멈췄다. 그 4년 동안 설계를 바꾸지 않았다. 팔리지 않아도. 자금이 없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지킴이 사람을 만들었다. 설계를 지켰기 때문에 그 설계를 먼저 알아본 사람들이 생겼다. 그 사람들이 돈을 냈다. 브롬튼이 다시 거리에 나온 것은 투자자의 판단이 아니라 사용자의 확신 때문이었다.

브롬튼은 먼저 믿은 사람들이 만든 자전거다.

자주 묻는 질문

정원사 앤드루 리치가 왜 자전거 설계에 나섰나?

리치는 1970년대 런던에서 정원사로 일하며 자전거로 이동했다. 자연을 가까이하는 직업 특성상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것 자체를 즐겼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지하철 환승 구간에서 자전거가 짐이 되는 불편함을 매일 겪었다. 기존 접이식 자전거(Bickerton Portable 등)가 있었지만 실제 도심 이동에는 부족했다. 공학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 설계의 논리에 갇히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설계할 수 있었다.

1982년 생산 중단 후 브롬튼은 어떻게 다시 시작됐나?

1982년 자금난으로 생산이 멈춘 뒤 리치는 설계를 바꾸지 않은 채 다른 일을 하며 제조 가능성을 탐색했다. 1986년 재개 자금은 기관 투자가 아니라 지인들과 이전 고객들이 냈다. 이미 브롬튼을 한 번 써본 사람들이 다음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나임 오디오 창립자 줄리언 베레커가 은행 대출 보증인이 됐고, 브렌트퍼드 철도 아치에서 생산이 재개됐다. 1988년 초 대량생산 브롬튼이 다시 거리에 나왔다.

브롬튼이 설계를 50년 가까이 바꾸지 않은 이유는?

1979년 특허로 잡은 기본 프레임 구조가 처음부터 도심 이동의 본질적 문제를 풀었기 때문이다. 리치는 라이선스 판매 거절, 자금난, 생산 중단을 겪으면서도 설계를 단순화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브롬튼 한 대에는 1,200개 이상의 전용 부품이 들어가며 강철 프레임은 지금도 브레이징 수작업으로 접합한다. 설계를 지킨 것이 브랜드를 지킨 것이었다.

자주 묻는 질문

브롬톤이 라이선스 판매 5년 실패 후에도 설계를 단순화하지 않고 직접 제조를 선택한 이유는?

앤드루 리치는 기존 접이식 자전거가 실제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타협 없는 설계를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판단했다. 라이선스 협상 과정에서 설계 단순화 요구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1979년 특허 구조를 지킨 채 직접 생산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그 구조는 현재 연간 약 5만 대를 생산하는 영국 최대 자전거 제조사의 근간이 됐다.

브롬톤 자전거 1986년 생산 재개 자금은 어떻게 조달했나?

1982년 생산이 멈춘 뒤에도 리치는 도면을 바꾸지 않았고, 1986년 재개를 가능하게 한 것은 기관 투자자가 아니라 이미 브롬톤을 써본 실사용자들의 자금이었다. 이는 제품 자체가 초기 고객을 팬으로 전환시킨 사례로, 사용 경험이 투자 설득력을 대신한 구조다. 공학 교육 없이 시작한 창업자가 제품 완성도만으로 재기 자본을 끌어낸 드문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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