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만드는 목수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은 덴마크 빌룬트의 목수였다.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고, 문과 창문을 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드는 일이었다. 1924년 공장이 불에 탔다. 다시 지었다. 1930년대 대공황이 덴마크까지 밀려왔다. 가구를 살 사람도, 집을 지을 사람도 없었다. 일거리가 사라졌다. 직원들을 내보냈다. 빚만 남았다.
아내를 잃은 아버지
1932년, 올레는 아내 크리스티네를 잃었다. 사업이 무너지던 그 해였다. 네 아들이 남았다. 그는 목공소에 남은 나무 조각으로 오리 장난감을 깎았다. 아들들에게 줄 것을 만든 것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했다. 그는 그것을 들고 행상을 했다. 가게마다 찾아다니며 팔았다. 장난감을 음식과 맞바꿔 아이들을 먹이기도 했다. 그게 레고의 시작이었다.
레고의 철학은 이렇게 정의됐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만들 때 그들은 자연의 법칙과 자신의 지적·신체적 한계를 직접 시험한다. 그 말이 정확히 언제 나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마음은 1932년에 이미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었을지 모른다. 아내가 남기고 간 자녀들을, 엄마 없이도 잘 키워내겠다는 아버지의 각오였을지 모른다. 재혼하지 않았다. 네 아들과 그 신념을 함께 키웠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트프레드는 올레의 셋째 아들이었다. 열두 살이 되던 1932년부터 방과 후 아버지 공장에서 일했다. 어느 날 그는 완성된 목제 오리 장난감을 기차역으로 보내면서 바니시를 규정대로 세 번이 아닌 두 번만 칠했다. 비용이 절감됐다고 아버지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표시도 안 난다고 했다.
올레는 직접 기차역까지 걸어갔다. 물건을 전량 회수했다. 한 번 더 칠했다. 다시 보냈다. 단순한 품질의 문제였을까. 어쩌면 그건 아이들에게 물려줄 신념의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말했다: “Det bedste er ikke for godt.” 최고가 아닌 것은 충분하지 않다. 고트프레드는 그 문구를 나무 사인에 직접 새겨 공장에 걸었다. 아버지에게 들은 말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그 나무 사인은 지금도 남아 있다. 켈의 소장품이다.
아들이 또 아버지가 되어
고트프레드는 에디트와 결혼해 세 자녀를 뒀다. 귄힐드, 켈, 하네. 1950년대 레고 박스 아트에는 세 아이가 레고 벽돌을 갖고 노는 사진이 들어갔다. 1955년 박스 커버에는 여덟 살 켈이 레고 세트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담겼다. 그 장면은 2008년 레고 50주년 기념 세트에 그대로 다시 인쇄됐다. 1961년에는 고트프레드가 켈에게 아이 사이즈 포드 T 자동차를 선물했다. 놀이는 그 집안의 언어이고 철학이고 생존이자 신념이었다.
1969년 10월, 스물한 살 켈은 여동생 하네와 함께 귀가하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하네가 사망했다. 켈은 중상을 입었다. 고트프레드는 그 충격으로 회사 매각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팔지 않았다.
그 고통을 버티고 추스린 이유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켈은 정확히 그것을 이어받았다. 시간이 흐르고 쌓인다는 건 단순히 오래됐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수반되는 고통도 행복도 이곳에 모두 차곡차곡 쌓였다는 이야기다. 그게 곧 헤리티지다. 10년 뒤인 1979년, 켈은 레고 그룹 CEO가 됐다.
확장과 균열
1979년 CEO에 취임한 켈은 레고를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했다. 테마 세트, 미니피규어, LEGO.com, Lego Mindstorms, 라이선스 제품이 차례로 나왔다. 1990년대 후반 확장의 속도가 더 올라갔다. 더 많이 만들수록 더 많이 팔린다는 전제 위에서 움직였다. 2003년 매출은 전년 대비 26% 급감했다. 제품이 많아질수록 올레가 세운 기준과 거리가 멀어졌다. 켈은 한때 그것을 잊었다. 더 많이 만들수록 처음의 기준은 희미해졌다. 그러나 이내 다시 깨달았다. 1955년 박스 커버 속 여덟 살 아이가 그 안에 여전히 있었다.
내려놓은 방식
2004년 켈은 CEO직에서 내려왔다. 경영 자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철학이 살아남을 구조를 만들기 위해 그 자리로 내려온 것이었다. KIRKBI A/S와 레고재단 이사회 의장직을 맡았다. 레고 그룹 오너이자 이사회 부의장으로 소유 구조를 직접 설계했다. CEO 자리에서는 내려왔지만 철학이 흘러야 할 통로 위에 올라섰다. 2008년 National Toy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다. 할아버지 올레는 1989년 같은 자리에 이미 기록돼 있었다. 손자와 할아버지가 같은 곳에 기록됐다.
소울파파마케팅의 시선
레고의 첫 번째 장난감은 팔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1932년 아내를 잃은 아버지가 네 아들에게 줄 것을 만든 것이었다. 올레는 남은 나무 조각으로 오리를 깎았다. 아이들이 좋아했다. 그것이 레고가 됐다.
그 사랑이 신념이 됐고, 신념이 양육의 방식이 됐다. 고트프레드는 열두 살부터 아버지 공장에서 일했다. 바니시를 한 번 덜 칠했다가 아버지가 직접 역까지 걸어가는 것을 봤다. 켈은 여덟 살에 레고 박스 커버에 등장했다. 켈의 아들 토마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놀이는 우리가 어린 시절 세계를 탐색하는 언어다.” 올레가 1932년에 오리를 깎으며 믿었던 것과 같은 말이다.
레고는 3대를 거쳐 4대째 이어지고 있다. 비상장 구조 때문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강의한 것이 아니라 — 직접 살아낸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브랜드를 지킨 건 정관도 이사회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사랑했는가였다. 레고는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장난감 브랜드다. 130개국의 아이들이 같은 벽돌을 손에 쥔다. 그 손 안에서 1932년 빌룬트의 목수가 아들에게 남긴 것이 여전히 살아있다.
다른 CEO 인터뷰
참고 문헌
- Ole Kirk Christiansen — Wikipedia
- Godtfred Kirk Christiansen — Wikipedia
- Kjeld Kirk Kristiansen — Wikipedia
- Lego Group — Wikipedia
자주 묻는 질문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이 1932년 레고를 만들게 된 계기는?
1932년 아내 크리스티네를 잃은 해 가구 사업이 무너지던 시기에, 올레는 목공소에 남은 나무 조각으로 오리 장난감을 깎아 네 아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이 좋아하자 그는 이 장난감을 행상하며 판매했고, 때론 음식과 맞바꿔 아이들을 먹이기도 했다.
고트프레드가 바니시를 규정대로 칠하지 않았을 때 올레의 대응은?
열두 살 고트프레드가 비용 절감을 위해 바니시를 두 번만 칠해 보낸 제품에 대해, 올레는 직접 기차역까지 걸어가 물건을 전량 회수하고 한 번 더 칠해 다시 보냈다. 이때 “Det bedste er ikke for godt(최고가 아닌 것은 충분하지 않다)”라는 신념을 전달했고, 고트프레드는 이 말을 나무 사인에 새겨 공장에 걸었다.
켈이 2004년 CEO 자리를 내려온 이유는?
2003년 레고 매출이 26% 급감하면서, 켈은 확장 과정에서 창립자 올레의 기준과 신념으로부터 멀어졌음을 깨달았다. 2004년 CEO직에서 내려온 것은 경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올레의 철학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한 결정이었다.

강현구(Hyun-gu Kang, Brand & Marketing Director) 소울파파마케팅은 24년도 상반기 1,000억 매출을 기록하고 스킨1004로도 유명한, 크레이버코퍼레이션의 글로벌 K-뷰티 플랫폼 ‘UMMA‘, ‘이데넬‘ 을 비롯해, 올리브영 입점 중인 ‘이퀄베리‘, ‘플르부아‘, ‘셀비엔‘, ‘에이피엘비‘, 다이어트 브랜드 ‘라누보‘, ‘닥터디엣‘, 키즈 브랜드 ‘피카부‘, ‘미래홍삼‘, 애견 관련 ‘멀로‘, ‘초코펫하우스‘, ‘옵스틴‘, 골프웨어 링스로 유명한 엘엑스컴퍼니의 ‘V12‘, 여성 언더웨어 ‘쿠프‘, 30년 전통의 ‘강화도령화문석‘ 등의 수 많은 프리미엄 브랜드와 함께해 오고 있습니다.
